마쓰에 소요 사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마쓰에 소요사건(일본어: 松江騒擾事件 마쓰에소조지켄[*])은 1945년 8월 24일 일본제국 시마네현의 현청 소재지 마쓰에시에서 청년 단체 "황국의용군"(일본어: 皇国義勇軍)에 속한 수십명이 무장 봉기하여 현내 주요시설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일로 1명이 사망하였다. 마쓰에 소요사건이라는 명칭은 일본정부에서 사용한 것으로, 황국의용군사건[2], 시마네현청 방화사건(일본어: 島根県庁焼き打ち事件 시마네켄초야키우치지켄[*])이라고도 불린다.[1] 이 사건은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의항복에 반대하여 일어난 여러 소요사건 중 하나로,[3] 지방 도시인 마쓰에시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일본제국 시대에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동요가 목적인 마지막 쿠데타이자[4][5], 일본 제국헌법에 따라 일본대심원에서 재판한 마지막 사건이기도 하다.[6]
1945년 8월 15일 포츠담선언의 일본천황의 승낙에 따른 일본제국의 항복이 일본의 제 124대 천황 쇼와천황 히로히토의 라디오방송(옥음 방송)을 통해 일본 전 국민에게 발표되고, 이틀 후 8월 17일 도쿄도에서는 항복에 반대하는 존양동지회 회원들이 미나토구의 아타고산(일본어: 愛宕山 아타고야마[*])에서 농성하며 전국에 봉기를 주장하는 소요사건이 발생하였다. 마쓰에 소요사건은 이 아타고산 농성에 호응하는 형태로 발생했다.[3] 존양동지회의 회원인 오카자키 이사오를 중심으로 20세 전후의 남녀 수십명이 "황국의용군"이라 자칭하며 8월 24일 새벽에 봉기하였고, 흩어져서 시마네현내의 주요시설을 모두 습격하였다. 시마네현청은 불에 소실되고, 신문사, 발전소도 그 기능이 일부 마비무력화되었다. 사전 계획에서는 현지사와 지방검찰의 검사정(현:검사장)의 암살도 도모되었지만, 계획에 차질이생겨 실패하였다. '황국의용군' 일당은 시내 각지를 습격한 후, 전국에 봉기를 주창하기 위하여 방송국에 모였으나, 방송국장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봉기대와 방송국장 사이의 말다툼이 계속되는 사이 도착한 경찰관과 일본군대가 방송국을 포위, 봉기대 전원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마네현 청사와 의사당 등 3,000m²가 타버려 192만 엔의 피해액[7] 을 남기고 방화 당시에 주민 1명이 살해되었으며[1] 주요문서 등이 다수 소실되었다.[8] 또한 발전소 습격의 영향으로 마쓰에시내는 약 3시간 30분간 즈음에 걸쳐 정전되었다.[9] 신문사도 습격의 영향으로 8월 31일까지 타블로이드판으로 신문을 발행하였다.[10] 행정·치안 당국을 비롯한 패전 직후의 시마네 현민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지만[11] 보도관제 등으로 이 성공을 거두어, 이 봉기가 일본전역에 파급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5] 황국의용군의 주요 단원들은 복역이후 교육자나 인쇄회사직원, 산업폐기물처리업 등에 종사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고드러났고 그 외의 단원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주동자 오카자키 이사오(일본어: 岡崎功, 본래 한자 岡崎允佐夫[12], 1920년 7월 17일[13] ~ 2006년[14])는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1939년 3월 마쓰에 중학교를 졸업한 후, 2년 간 만주의 미쓰이 물산 펑톈(奉天) 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국수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42년 11월 일본으로 돌아와 승려가 되고자 일련종 계열의 릿쇼 대학 전문부에 입학하면서 중학교 시절의 친구였던 히로에 고분(広江孤文, 다른 한자 표기 広江弘文)가 가입해 있었던 국가주의 단체 긴노마코토무스비에 들어가, 국가 혁신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오카자키에게 영향을 준 서적으로 미쓰다 이와오의 《쇼와 풍운록》, 마쓰나가 모토키의 《황국체제》, 아마노 다쓰오의 《국체황도》 등이 있다.[1][15]
오카자키는 사재를 털어 도쿄 부립(府立) 고등학교 인근 (지금의 도쿄 도립대학, 당시의 메구로 구 다카마에 정[15])에 "일심료"(一心寮 잇신료[*])를 세워, 거기서 매일 밤 다쿠쇼쿠 대학 2학년 사이토 나오유키 등 7 ~ 8명과 함께 정치가, 군벌을 비판하는 격론을 펼쳤다. 이 때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시기로, 몇몇 세력들 사이에서 도조 히데키 내각의 타도나 암살 계획이 여러번 이루어졌다. 내대신 기도 고이치나 나카노 세이고 등도 내각총리대신·육군대신·해군대신을 쇄신하는 비밀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챈 도조가 선수를 쳐 새 총리 후보로 점지되어 있었던 우가키 가즈시게가 구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를 파악한 오카자키는 도조가 육해군의 협조를 저해하고 있어, 대화로는 상황이 진전되지 않으리라 보고 도조와 이치키 기토쿠로의 암살을 계획[12][16], 와세다 대학의 교련 장교로부터 수류탄, 권총을 손에 넣어 그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카자키와는 별도로 사이토 일당이 기획하고 있었던 도조 타도 계획이 사전에 헌병대에 의해 발각되어 차례차례 계획이 밝혀지자 오카자키도 연행되었다. 오카자키는 1943년 7월, 방화살인예비·폭발물단속벌칙 위반에 따라 연행되어 스가모 구치소에서 1년 반 동안 갇힌 후, 1944년 9월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16] 오카자키는 그 해 11월 석방되었지만, 이지마 요시오(飯島与志雄)가 결성한 존양동지회에 바로 가입했기 때문에 특별고등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고향 마쓰에로 돌아간 후에는 쇼와 유신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근로동원서용원(勤労動員署傭員)이 되었다.[15][17] 오카자키가 태평양 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계기는 근로동원서용원에서 근무한 일이었다.[18]
이 근로동원서에서 오카자키는 요주의 인물이라는 인물상과는 사뭇 다른 행동들을 취했다.[17] "군수 공장에 사람을 징용할 때는 개개인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집안의 사정으로 징용을 면제해달라고 탄원하는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자 자신의 책임으로 이들을 면제해주었다. 그 결과 서장과 의견이 부딪혀, 구레 시에 있는 해군 공장에서 일할 여성 정신대원 75명을 1주일 안에 추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카자키는 정신대원을 추리기 위해 신상서를 조사하면서, "지위가 높은 이들의 자제는 징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카자키는 재판소 소장과 검사정(검사장에 해당)의 딸을 여성 정신대로 뽑았고, 그들의 자제가 여성 정신대로 추려진 일을 현지 신문에서는 대서특필했다. 근로동원서장과 검사정은 크게 분노하여 오카자키를 협박했지만, 오카자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추려진 여성 정신대원이 출발하기 이틀 전, 오카자키는 오사카부로 출장을 나갈 것을 명령받았다. 얼마 후 출장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오카자키는, 이미 출발한 여성 정신대 중에 유력자들의 딸들이 다시 제외되어 돌아간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오카자키는 근로동원서에 사표를 제출하고, 1945년 4월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에 들어갔다.[19] 이 시기에 도쿄 대공습과 이오 섬 전투 등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상황은 일본에게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주불멸", "일억총옥쇄" 등의 선전 문구들이 유행하였고, 일본 국민은 본토 결전을 위해 동원되고 있었다. 시마네현에서는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기 위하여 고등여학생들이 송곳을 항상 지니고 다니게 했으며, 어린이들에게는 소년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길이의 죽창이 보급되었다.[20]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는 마쓰에 시내의 변호사였던 와다 요시요리의 사무소의 방 한 칸과, 후카다야 여관 (후카다 여관이라고도 표기하는 사료가 있다.[21]) 별관 2층을 사무로소 사용하였다. 이 여관은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장 사쿠라이 사부로고에몬이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기도 했다. 오카자키는 존양동지회에 연락을 취한 뒤, 사쿠라이, 하타노 야스히코, 하세가와 후미아키, 모리와키 아키요시, 시라나미 라이토 등과 함께 패색이 짙은 전후에 대해 초조해하면서 "쇼와 유신과 일제 봉기"를 모의하였다. 이 봉기에 대하여, 지부장 사쿠라이는 민간인 뿐만 아니라 군대와도 연합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오카자키는 반대하였다. 오카자키는 "군대와 연락을 취할 여유가 없고, 민간인들이 먼저 일어나면 군대들은 거기에 따라 스스로 쇼와 유신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카자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하타노, 하세가와 등 젊은 세대로부터 지지를 얻었다.[22]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에 따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승낙한다는 것, 즉 "일본의 항복"이 일본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다음 날인 16일부 《시마네 신문》 사설에서는 이를 "휴전조칙"이라고 전하였다. 국민에게 "국가의 보존"(일본어: 国体の護持 고쿠타이노 고지[*])을 밝힌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총사직하였으며, 17일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이 발족하였다. 일본이 정치적 격동을 맞게 된 가운데, 시마네 현지사로 시마네 현 국민의용대 본부장이기도 했던 야마다 다케오는 15일에 '고유'(告諭)를 발표하여, "반성의 마음과 쓰라린 아픔을 가슴에 새길 것"과, "자포자기나 증오심 때문에 일본 국민들의 분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을 현민들에게 부탁하였다. 다음날 16일에는 "조국의 부흥", "황국의 부흥"을 위해 현민의 결속을 이룩한다는 목적에 따라 "현민지휘방책대강"을 결정하여, "이번 외교 충돌의 경과·내용 및 전쟁 종결을 가능한 한 현민들에게 발표"한다는 방침을 전했다. 또 3, 5, 6항에서는 현민들 스스로의 반성을 바탕으로 전쟁의 책임을 나눌 것을 부탁하며, 다른 이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지 말 것과, 천황의 명을 언제나 따를 것을 당부했다. 이처럼 시마네 현 당국이 질서 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한편으로 군 당국도 현민을 단속했다. 8월 17일, 마쓰에 지구 사령관이었던 오가와는 "'휴전조칙'을 받아들였다하여 마치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착각하거나, 억지에 기반한 유언비어에 속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히며, 조칙의 취지에 따라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용감한 투쟁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23]
8월 15일 종전을 전후하여 군대의 내부에서는 궁성 사건이나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아쓰기 항공대의 항전 주장, 기지 점거 등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아타고 산에서의 존양동지회원의 농성·자폭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22일 전까지 모두 진압되었지만[24], 시마네 현 마쓰에 시에서는 8월 17일부터 19일에 거쳐 인접한 돗토리현 미호 항공대 기지에서 날아 온 해군기가 "결사 항전"(일본어: 断固抗戦 단코 코센[*])의 주장을 담은 선전물을 뿌렸고, 시내에서도 "소련 타도·성전 완수"의 내용을 담은 벽보가 붙여졌다.[25] 또 가노아시 군 가키노키 촌에서는 8월 20일 새 촌장 선임 무렵 "본토 결전"의 분위기가 퍼져있었다.[26]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일어난 공습을 통해,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이 이미 밝혀졌으나, 공습을 받은 일이 없는 산인 지방에서는 전쟁을 계속 속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이것이 마쓰에 소요 사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7]
8월 15일, 옥음방송을 들은 하타노와 하세가와는 이미 궐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오카자키와 만났다. 한편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장 사쿠라이는 니타 군의 자택에서 옥음방송을 듣고, 바로 마쓰네 시의 연대 본부에서 아는 사이였던 연대장을 만나, 연대장의 진심을 확인하였다. 사쿠라이는 연대장은 체념한 상태였으며, 군은 궐기할 상황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사쿠라이는 오카자키 일행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후카야 여관 별관에서 이루어진 논의는 급속도로 의미를 잃어갔다.[28] 군대의 참가가 불가능함을 확인함으로써, 사쿠라이는 오카자키 일행을 덜 주시하게 되었다. 사건 후, 사쿠라이가 봉기의 배후라는 소문이 떠돌자 사쿠라이는 이를 부정했다. 이에 대하여 언론인 하야시 마사유키는 "후카야 여관 본관에서 오카자키 등과 일제히 봉기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던 사쿠라이가 봉기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오카자키 일행이 무언가를 일으키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에는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고, 봤어도 못 본 척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29] 또 이노세 나오키도 사쿠라이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28] 이 당시 사쿠라이는 야스오카 마사히로가 설립한 긴케이 가쿠인의 사실상의 산인 지부였던 "산인소행회"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야스오카 마사히로 자신이 종전의 조칙을 펴내는 일에 거들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긴케이 가쿠인도 조칙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야시 마사유키는 이러한 상황에서 산인소행회장 사쿠라이가 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 또 군대와의 연합도 불가능하여 자기 자신이 행동을 할 수 없었지만, 오카자키의 주장에도 공감하였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했다.[30]
오카자키는 종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22], 철저한 항전과 봉기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도쿄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오카자키는 특별고등경찰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고등경찰의 과장으로부터 도쿄로 올라가려고 하면 구속할 것이라는 주의를 받았다.[31] 8월 17일, 오카자키가 도쿄로 가는 것을 저지한 특별고등경찰 쪽이 방심하고 있던 사이, 오카자키를 대신하여 하타노가 마쓰에 시를 떠나 도쿄로 떠났다. 다음 날, 하타노는 공습으로 불타버린 도쿄도에 이르렀다. 공습을 받은 도쿄 도를 보면서도 하타노는 일본에 전쟁을 속행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하타노는 나카노 구의 방공호에 있었던, 마쓰나가 모토키의 문하생 니시 미치하루(西 三千春)로부터 도쿄의 정세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충고를 들었는데, 니시는 시마네 현에서 경솔히 움직일 게 아니라 전국민이 일제히 봉기해야한다는 것, 봉기했을 때는 가스미가우라 주둔지에서 비행기를 움직여 환영할 것이라는 니시 스스로의 뜻 등을 하타노에게 전했다. 하타노는 대혼란 상태였던 도쿄 역에서 출발하여, 교토부를 지났을 즈음 한시 바삐 알리기 위해 하세가와에게 전보를 쳤다.[32]